건강권은 단지 병원에 갈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누구나 차별 없이 최상의 건강 상태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받는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건강권은 단지 병원에 갈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누구나 차별 없이 최상의 건강 상태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받는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이는 세계보건기구(WHO)와 유엔장애인권리협약(UN CRPD)에서도 명시되어 있으며,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건강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러한 건강권이 장애인에게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 물리적인 접근성의 문제가 있습니다. 병원 건물의 계단, 턱, 좁은 복도 등은 휠체어 이용자에게 큰 장벽이 되며, 청각 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 서비스가 부족한 병원이 여전히 많습니다. 또한, 지적장애나 발달장애인을 위한 설명과 소통 방식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진료를 포기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장애인의 건강권은 단순한 의료 접근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예방의료 서비스에의 접근, 건강검진의 기회, 재활 및 정신건강 서비스 등 다양한 요소가 통합되어야 진정한 건강권이 실현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통합적 접근이 부족한 실정이며, 공공의료 시스템에서도 장애인 특성에 맞춘 진료 체계가 미비합니다.
따라서 장애인의 건강권은 법적 권리를 넘어서서, 정책적, 실천적 차원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실생활 속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건강권 보장의 출발점입니다. 단순히 병원 문턱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존엄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장애인의 건강권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1. 장애인 건강 불평등의 현실. 통계로 본 차별과 사각지대
장애인이 겪는 건강 불평등은 단순한 체감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통계가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겪는 건강 불평등은 단순한 체감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통계가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국내 여러 연구에 따르면,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당뇨, 고혈압, 우울증, 심혈관질환, 비만 등의 만성질환 발병률이 현저히 높습니다. 그러나 정작 정기 건강검진 수검률이나 조기 진단율은 현저히 낮은 편입니다. 이러한 격차는 장애의 유형에 따라 더 두드러집니다. 예를 들어, 발달장애인은 일반적인 건강 검진을 받기 어려워 사소한 질병이 중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장애인의 60% 이상이 정기 건강검진을 받지 않는다고 응답했습니다. 이유는 병원 접근이 어렵거나, 의료진이 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였으며, 일부는 치료 과정에서 불친절하거나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았다고도 말했습니다. 또한, 여성 장애인의 경우 산부인과 진료 접근성이 떨어지고, 성폭력 피해나 성 관련 건강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의료인이 매우 부족한 상황입니다.
심리적 건강 격차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장애인은 사회적 고립, 경제적 불안, 차별 경험 등으로 인해 정신건강에 취약하며, 자살률 역시 비장애인보다 높은 경향을 보입니다. 특히 청년기 장애인의 우울증 발병률은 매우 높으며, 이를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상담기관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입니다.
이러한 통계는 단지 수치의 나열이 아니라, 건강권이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숫자는 침묵하지 않습니다. 이 불평등을 해결하려면 의료제도, 교육, 복지, 고용 등 사회 전반에서의 통합적인 개입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를 반영한 정책이 수립되어야 합니다.
2. 제도는 있지만 실효성은 낮다. 정책의 사각지대를 돌아보다
이들 정책은 분명히 건강권 증진을 위한 의지를 보여주는 긍정적 신호입니다. 그러나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있으나 마나”라는 반응이 적지 않습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다양한 장애인 건강 관련 정책을 발표해왔습니다. ‘장애인 건강검진 지원 사업’, ‘장애인 건강주치의 제도’, ‘지역장애인보건의료센터’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들 정책은 분명히 건강권 증진을 위한 의지를 보여주는 긍정적 신호입니다. 그러나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있으나 마나”라는 반응이 적지 않습니다. 이는 실효성 부족, 접근성 문제, 홍보 미흡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 건강주치의 제도는 복합적인 만성질환이나 장애 관련 건강 문제를 꾸준히 관리해줄 주치의를 연결해주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이 제도에 참여한 의사의 수는 매우 적고, 의료진조차 이 제도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지관이나 거주시설 중심으로만 정보가 전달되어, 실제로 지역 사회에서 홀로 살아가는 장애인은 이 제도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역장애인보건의료센터’는 장애인의 건강관리와 재활을 지원하기 위한 기관이지만, 전국적으로 설치 수가 제한적이며 지방의 접근성은 더욱 떨어집니다. 또한 인력 부족으로 인해 장기적 관리를 기대하기 어렵고, 협업 체계도 미흡합니다. 결국 제도는 있지만 현장에서는 활용하기 어려운 ‘보여주기식 정책’이라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정책은 단지 만들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정책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현장성, 지속성, 사용자 중심의 설계가 필요합니다. 특히 장애인 당사자와 그 가족, 관련 전문가들이 정책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제도는 현실에 닿고, 건강권은 이름뿐인 권리가 아닌 살아 있는 권리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3. 모두를 위한 건강권.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한 패러다임 전환
장애인의 건강권을 보장하는 일은 단순히 소수자를 위한 시혜적 복지가 아닙니다.
장애인의 건강권을 보장하는 일은 단순히 소수자를 위한 시혜적 복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두를 위한 사회, 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 조건입니다. 장애인이 안심하고 병원에 가고,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며, 스스로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은 비장애인에게도 유익한 의료 시스템으로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병원의 문턱을 낮추고 시각·청각장애인을 위한 보조 안내 시스템을 강화하면, 고령자나 외국인, 문해력이 낮은 이들에게도 더 친절한 병원이 됩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언어 자료는 치매 환자나 아동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건강권에 포용적 관점을 적용하면, ‘장애인을 위한’ 정책은 곧 ‘모두를 위한’ 정책으로 전환됩니다.
또한, 장애인의 건강권을 보장하는 것은 단지 의료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입니다. 사람답게 살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자기 몸을 스스로 돌볼 수 있는 권리는 건강권이라는 틀 속에서 함께 지켜져야 할 기본 가치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 전체의 인식 변화도 절실합니다. “장애인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무관심이나 “그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왜곡된 시각은 건강한 공동체의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장애인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특별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입니다. 같은 진료실에서, 같은 설명을 듣고,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권은 권리이며, 그 권리는 모두의 것입니다.